아마도 성공 이후 느낄 감정은 기쁨과 환희에 가까울 것 같은데요. 화제의 개봉작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은 성공 이후 극심한 고통과 슬픔을 겪었다고 합니다. 오늘 아티클은 아직 <오펜하이머> 영화를 관람하지 않으신 분들과 이미 관람하신 분들 모두 편하게 읽으실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 살며시 그의 복잡한 마음을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 유튜브
지난 6월 유튜브는 한국에서 공식 쇼핑채널을 열고 라이브커머스 사업을 시작한다는 소식을 알렸었는데요. 유튜브 쇼핑은 영상 내 다양한 위치에 상품을 노출하여, 콘텐츠 시청이 구매까지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서비스입니다.
유튜브는 공식 쇼핑채널을 여는 것이 아닌 ‘쇼핑 탭’을 활용해 라이브커머스방송을 한 자리에 모아 보여주고 있는데요. 세계 최대 동영상 플랫폼이 ‘라이브 커머스’로 사업 영역을 확대하는 것은 기존 업체들의 판도를 크게 바꿀 것으로 보입니다.
이는 기존 광고 중심의 비즈니스 모델에서 다양한 수익 모델을 창출하기 위한 시도로 추측되는데, 결국 수익의 대부분을 크리에이터에 의존한다는 점에서 인플루언서 마케팅과 비슷한 양날의 검을 보입니다. 과연 앞으로의 향방은 어떻게 될까요?
ⓒ 워너 브라더스
ⓒ 워너 브라더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CG를 쓰지 않고 실사촬영을 선호한다고 알려져 있는데요, 실제로 심어서 키운 인터스텔라의 옥수수밭과 테넷의 보잉 747기 폭파는 이미 유명하죠.
tvN의 <알쓸별잡>에 깜짝 출연한 놀란은 이에 대해 관객이 영화를 통해 현실의 감각을 느끼길 바라기 때문에 최대한 실제로 찍는다고 답했습니다. 실사촬영은 그래픽보다 더 공감되고, 실제적이고, 위협적이고, 무게감 있다는 그의 생각은 이번 영화 <오펜하이머>에도 반영됩니다. 첫 번째 핵폭발 실험인 트리니티 테스트를 CG 없이 구현했는데요. 단 한컷도 컴퓨터 그래픽을 사용하지 않고, 거대한 버섯모양 불기등을 만들어냈다고 하는데, 놀란의 ‘제로 CG’ 작품 <오펜하이머>는 새로운 흥행 역사를 쓸 수 있을까요? 영화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다면 지금부터 달이레터를 주목해주세요!
어제 개봉한 따끈따끈한 신작이죠.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오펜하이머>는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맨해튼 프로젝트 속 과학 이론과 기술 분야 총책임자를 맡은 인물, '오펜하이머'를 다룬 전기 영화입니다. 3시간이란 긴 러닝타임을 가진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녹여진 <오펜하이머>. 오늘 아티클은 알고 보면 더 몰입할 수 있는 당시 사건들과 어딘가 닮아있는 노벨의 삶을 다뤄보았습니다.
*맨해튼 프로젝트 – 제 2차 세계대전 나치에 대응하기 위해 구성된 핵폭탄 개발 프로젝트
ⓒ동아 사이언스
ⓒ아인슈타인-실라르드 편지 | 위키피디아
1939년 8월 2일 미국 물리학자들이 당시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에게 핵무기 개발을 요청한 편지가 긴 서사의 시작이었습니다. 편지에는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아인슈타인의 서명도 남겨져있었는데요. 편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독일이 핵분열을 이용해 폭탄을 만들면 더 위험할 수 있다. 그러니 미국이 먼저 만들어야 한다"였습니다. 실제로 2차 세계 대전 직전 원자가 쪼개진다는 사실과 동시에 막대한 에너지가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한 독일의 물리학자들이 있었기 때문인데요. 이를 본 대통령은 미국원자력위원회(AEC)를 구성하고 레슬리 그로브스 소장을 필두로 1942년 맨해튼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트리니티 실험 당시 사용된 폭탄의 모습 | 위키피디아
약 3년간 13만명의 인력과 300조의 예산이 들어간 맨해튼프로젝트는당시상황만큼영화에서긴급하게묘사되는데요. 그렇게프로젝트의목적이었던핵무기개발의마침표를찍는트리니티실험이 1945년 7월 16일성공하게 되었습니다.
오펜하이머와 마찰을 빚으며 영화에서 갈등의 한 축을 맡은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루이스 스트로스로 미국원자력위원회(AEC) 초대의장이자 프린스턴 고등연구소 이사였습니다. 그는 경영인 출신인 자신을 깎아내렸던 오펜하이머를 과거 사회주의 모임에 참석한 것을 근거로 비밀청문회에 서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자신 또한 상무장관이 되고자 후보 청문회에 올랐습니다. (두 인물의 청문회 결과는 영화를 통해 확인하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 오펜하이머 스틸컷
① 1954년 오펜하이머의 보안 접근을 결정짓는 비밀청문회
② 1959년 스트로스의 상무장관 후보 승인을 결정짓는 청문회
오펜하이머와 닮은 듯 다른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스웨덴의 발명가이자 화학가 알프레드 노벨입니다. 노벨 역시 자신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의도와는 다르게 전쟁 무기로 사용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제 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키는 원자폭탄을 개발한 오펜하이머와 자본가로 성공한 노벨 두 사람의 삶 후반부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유언 집행자는 유산을 안전한 유가증권으로 바꿔 투자하고,
그것으로 기금을 마련해 그 이자로 매년 전해에 인류를 위해 가장 공헌한 사람들에게 상금 형식으로분배해야 한다.
상금의 일부는 물리학에서 가장 중요한발견이나 발명을 한 인물에게, 화학에서 가장 중요한발견이나 개량을 한 사람에게,
생리학과 의학 분야에서 가장 중요한 발견을 한 사람에게 각각 주도록 한다.
상을 수여함에 있어서 후보자의 국적을 일체 고려해서는 안 된다.
또 남자이건 여자이건 조금도 차별하지 않고 가장 공로가 많은 사람에게 수여되는 것이 나의 확고한 소원이다.
나는 이것을 특별히 당부한다. 그리고 나의 죽음을 확인하거든 화장을 해줄것을 부탁한다.
- 노벨 유언장 내용 中 -
우리에게도 익숙한 노벨상은 유언장의 기록대로 알프레드 노벨의 축적된 자산으로 여러 분야의 공로자들에게 상금을 수여하는 상인데요. 그는 본인이 개발한 다이너마이트가 사회에 끼친 해악을 만회하기 위해 노벨상을 고안해냈다고 합니다. 1901년부터 국적불문 6개의 부문(경제학은 1968년부터)을 시상한 이 상은 그의 의도와 같이 지금까지 시행되고 있습니다.
ⓒ AP 통신
오펜하이머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노벨과는 다른 방식으로 원자폭탄 개발을 만회하고자 하였는데요.
그는 로스앨러모스 과학자 협회를 결성하여 핵무기 사용 반대를 촉구했습니다. 이를 통해 핵무기를 통제할 수단을 마련하자는 것과 평화적으로만 사용해야함을 주장했지만 당시 소련과 냉전 중인 미국 정부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에드워드텔러를통해 핵융합을 이용해 더 강한 파괴력을 지닌 수소폭탄개발되었다는 쓸쓸함을 남겼습니다.
조용히 은퇴 후 자신의 재산을 통해 만회하고자 한 노벨과 적극적으로 자신의 영향력을 활용해 바로잡고자 한 오펜하이머의 닮은 듯 다른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까지 살펴보았습니다. 역사고증과 촘촘한 내용 전개를 갖춘 놀란이 해석한 영화 [오펜하이머]. 궁금하시다면 지금 바로 극장에서 만나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