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에 있는 사람도 그 얼굴빛을 분별할 수 없어서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
- 인조실록 46권 23년 (1645) 6월 27일 -
'올빼미'는 인조실록에 실린 "마치 약물에 중독되어 죽은 사람 같았다"라는 글 한 줄에서 시작된 스릴러 영화입니다. 영화에서 소현세자는 청에 인질로 끌려간 후 8년 만에 귀국했지만 얼마 후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때 맹인이자 침술사인 경수가 소현세자의 죽음을 우연히 목격하면서 영화가 시작됩니다.
영화에선 사실과 허구가 공존합니다. 역사 속 실존 인물을 바탕으로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소현세자의 갑작스런 사망을 다룬다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어떻게 죽게 됐는지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아있는데요. 올빼미에선 이 미스터리에 허구를 넣어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한 이유를 밝혀줍니다.
그렇다면 실제 소현세자는 어떻게 된 걸까요?
💬 소현세자와 인조
당시 조선의 상황
사도세자를 죽였다고 실록에 적힌 영조와 달리 인조의 실록에는 소현세자를 죽였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하지만 소현세자의 죽음에 인조는 왜 자꾸 언급되는 걸까요. 이에 대해 알기 위해선 당시 조선의 상황과 인조에 대해 알아야 합니다.
인조는 광해군을 쿠데타로 몰아내고 왕의 자리에 앉은 조선의 16대 왕입니다. ‘반정(反正)’은 잘못된 것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을 내세워 왕을 교체하는 것으로, 인조반정을 일으킬 당시 광해군은 무리한 궁궐 공사를 강행하며 재정을 파탄 냈습니다. 이에 인조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자신이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인조가 재위할 당시는 명청 교체의 시기였습니다. 예로부터 명나라와 잘 지내던 조선은 청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무시했습니다. 청의 세력이 커지며 청은 명과 우호적인 관계를 보이는 조선에게 군신관계를 요구했지만 인조는 청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결국 청의 심기를 건드려 조선은 침략을 받고 병자호란이 일어납니다. 전쟁을 피해 피신하러 가던 인조는 상황이 여의치 않아 남한산성으로 숨게 됩니다.
삼전도의 굴욕
남한산성에서 45일 동안 지내던 인조는 청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결국 항복을 선언합니다. 인조는 항복 의식을 하기 위해 삼전도로 향했습니다. 이때 삼전도의 굴욕이라고 불리는 삼배구고두를 하게 됩니다. 삼배구고두는 청나라에서 황제를 대면할 때 취하는 예법으로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입니다. 인조는 세자를 비롯한 500여 명의 신하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그렇게 무시하던 청의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굴욕을 당합니다.
청나라에 인질로 간 소현세자
조선이 병자호란에서 패배한 후 조선의 세자였던 소현세자와 동생인 봉림대군은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에 끌려갑니다.
볼모로 끌려가 힘든 생활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예상들과 다르게 소현세자는 좌절하지 않고 잘 지내려 노력했습니다. 소현세자는 고관들과 접촉해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늘려갔습니다. 또한 친분으로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소현세자는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 농장에는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시장에서 돈을 주고 구출시켜 일하게 했습니다. 또한 청나라에 끌려 온 많은 조선인들을 무사 귀국할 수 있게 돕기도 했습니다.
💬 9년 만에 귀국한 소현세자
인조의 질투
인조는 청나라에서 활약하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인 소현세자를 질투하며 권위에 위협을 느꼈습니다. 소현세자가 돌아오기 전,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왕에 앉히려 한다는 소문을 듣고 아들을 경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명나라가 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더이상 볼모가 필요 없어진 청은 이들을 풀어줬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인질로 잡힌 조선인들은 모두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게 됩니다. 9년 만에 귀국했지만 인조는 소현세자와 세손들에게 위로의 말이나 귀국 축하 연회, 치하 등 무엇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귀국한 지 3달도 지나지 않아 소현세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 사인은 학질이란 병이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상황을 보고 많은 이들이 죽음의 원인을 독살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한편에선 승정원 일기, 심양일기를 토대로 지병 악화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도 제기하고 있어요. 하지만 사망 원인은 여전히 명확하게 밝혀지진 않았습니다.
소현세자는 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아프기 시작했는데요.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을 학질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의원들은 세자의 병명에 맞게 침을 놓는 시술과 탕약을 처방하며 치료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병을 치료 받은 지 4일 만에 소현세자는 사망했습니다. 병명에 맞게 치료했지만 왜 사망을 한 걸까요? 세자의 죽음에는 의문투성이인 것들이 많습니다.
세자는 '학질'이라는 병을 진단받았습니다. 학질은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여름 전염병입니다. 하지만 세자는 늦겨울 2월에 돌아왔기에 그 시기가 이상하다는 의문이 있습니다.
온대지역에도 말라리아는 유행하기 때문에 만약 학질이 맞다고 하더라도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약 처방이 아닌 침을 놓는 시술을 시행한 게 의심스럽다고 봅니다. 또한 온대지역 말라리아의 경우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가 드뭅니다. 조선왕조실록에 소현세자의 몸이 좋지 않았다는 묘사가 없기 때문에 사망에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아들의 죽음에 대한 인조의 태도
소현세자의 죽음이 독살이라는 의견에 더 힘을 실어주는 건 자식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인조의 태도입니다. 인조에게 대신들은 세자의 침을 놓은 담당 의원인 이형익을 처벌해야 한다고 수차례 간청했습니다. 하지만 인조는 굳이 처벌할 필요가 없다고 말하며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소현세자의 장례도 '검약'을 이유로 최대한 단출히 치렀다고 합니다. 이렇게 간소화해서 장례를 치룬 게 단순히 검약을 위해서가 아니라 소현세자에 대한 미움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있습니다. 또한 소현세자가 죽은 후 인조는 아들 무덤을 단 한 번도 찾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이뿐만 아닙니다. 원래 세자가 죽으면 적장자인 아들을 후사로 정합니다. 하지만 인조는 자신의 둘째 아들인 봉림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하며 세자로 임명합니다. 그리고 인조는 소현세자의 아내인 세자빈 강씨에게도 자신을 독살하려 했다는 누명을 씌워 죽입니다.
소현세자의 죽음은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인조가 귀국한 소현세자를 맞이한 태도와 여러가지 맥락상 정황으로 인해 독살 가능성에 힘이 실려있다고 합니다. 조선의 세자로 타지에서 온갖 고생을 했지만 결국 쓸쓸한 결말을 맞이한 소현세자의 이야기였습니다.
🌙 역사는 쓰인 자의 것이라는 말이있죠? 역사를 그대로 받으들이기보단 여러가지 맥락과 상황을 보고 해석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고 생각이 드는 이야기였습니다.
<올빼미>, 재밌게 읽으셨나요?
세줄 요약을 보며 정리하는 시간을 마련했어요✌️
💁 <올빼미>는 볼모로 끌려간 후 청나라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9년 만에 조선으로 귀국한 소현세자의 돌연사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 소현세자의 아빠인 인조는 청나라에서 입지를 굳건히 하고 있는 소현세자를 질투했다고 전해져요.
💁 그래서 소현세자 돌연사의 원인을 공식적인 병명인 학질이 아닌 아들에 대한 경계와 질투로 인한 독살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